AI가 못 만드는 단 하나 - AI, 유통 3부
들어가며
2년 전, 한 뷰티 브랜드 마케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희가 GPT로 인스타그램 캡션을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팔로워 반응이 괜찮았는데, 6개월 지나니까 댓글이 절반으로 줄었어요. 내용은 더 정확해졌는데."
같은 시기, 또 다른 종류의 이야기가 조용히 퍼지고 있었습니다. 실물 재고 없이 AI가 생성한 이미지만으로 제품을 미리 팔아보는 브랜드들. 실제 제작 전에 AI 영상 광고를 먼저 돌려서, 클릭률과 대기자 명단만으로 만들지 말지를 결정하는 팀들. 이 두 이야기는 서로 다른 얘기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질문의 앞뒤입니다.
AI가 검증과 생산의 비용을 0에 가깝게 낮췄을 때, 소비재 시장에서 진짜 경쟁은 어디로 이동하는가.
(1) AI는 이제 "만들기 전에 팔아본다"를 가능하게 한다
💡 핵심: 제품을 만들고 나서 시장 반응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반응을 먼저 확인하고 제품을 만드는 순서가 뒤집혔습니다. AI가 이 검증 비용을 극적으로 낮췄습니다.
원조는 드롭박스, 방식은 AI로 진화했다
이 접근의 원형은 2008년 드롭박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업자 드류 휴스턴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파일 동기화 기능을 보여주는 짧은 데모 영상 하나만 만들어 공개했습니다. 그 영상이 퍼지면서 베타 대기자 명단이 하룻밤 사이 5,000명에서 7만 5,000명으로 늘었습니다. 제품을 완성하기 전에 수요를 검증한 것입니다.
당시엔 영상 하나를 만드는 데도 상당한 기획과 제작 시간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생성형 AI로 제품 광고 영상을 몇 분 안에 만들 수 있고, 하나의 메시지를 여러 표현으로 변주해 동시에 테스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커머스 제품 영상 제작 비용은 기존 방식으로 건당 500~2,000달러가 들었지만, AI 영상 생성 도구를 쓰면 건당 몇십 달러 수준까지 낮아졌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이 조합이 만드는 새로운 워크플로우는 이렇습니다. 제품을 실제로 만들기 전에, AI로 제품 이미지·영상 광고를 먼저 만들어 소셜 미디어에 태웁니다. 클릭률과 랜딩 페이지 대기자 등록 수를 봅니다. 반응이 확인되면 그때 실제 생산에 들어갑니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이를 '페이크 도어 테스트' 또는 '프리토타이핑'이라 부르며, 실제 개발이나 제조에 자원을 투입하기 전에 진짜 수요가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례: 회사 자체를 AI가 운영한다
라이트앵커는 이 흐름을 한 단계 더 밀어붙인 사례입니다. 창업자들이 화장품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어도, AI 에이전트가 시장 데이터를 분석해 브랜드 콘셉트를 정하고, 광고 소재를 대량으로 생성하고, 어떤 소재의 클릭률과 전환율이 높은지 실시간으로 테스트하며, 좋은 성과를 내는 AI 모델에 더 많은 예산을 자동으로 배분합니다. 창업자의 역할은 결과물의 품질을 확인하고 방향을 조정하는 데 그칩니다.
이들은 Y Combinator 공식 소개에서 스스로를 "compute의 속도로 확장하는, 헤드카운트가 아니라"라는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즉 브랜드를 늘리는 데 사람을 더 뽑는 것이 아니라, AI 에이전트가 처리할 수 있는 연산량을 늘리는 것으로 확장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들은 여러 개의 실험 브랜드를 동시에 운영하며, 하나의 공유 플랫폼 위에서 새 브랜드를 낼 때마다 그 이전 브랜드의 데이터가 다음 브랜드의 성과를 개선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명확합니다. 제품을 검증하는 비용만 낮아진 게 아니라, 브랜드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비용 자체가 사람이 아니라 컴퓨팅 자원에 비례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만들지 아는 것"의 상당 부분을 이제 AI가 대신할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여기서 소비재 시장이 두 갈래로 갈린다
💡 핵심: AI로 검증하고 AI로 만드는 것이 쉬워질수록, 소비재 경쟁은 정확히 두 종류로 나뉩니다. 깊이가 없는 제품은 비용 싸움이 되고, 깊이가 있는 제품은 취향 싸움이 됩니다.
깊이 없는 경쟁: 누가 더 싸게, 더 빨리 만드는가
AI 카탈로그, AI 영상 검증, 그리고 라이트앵커처럼 브랜드 운영 자체를 AI 에이전트가 처리하는 구조가 결합되면, 어떤 팀이든 유사한 제품을 빠르게 복제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라이트앵커의 접근 방식 자체가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화장품을 전혀 몰라도, 시장 조사부터 광고 소재 생산까지 AI에게 맡기면 사업이 돌아갑니다. 이는 대단한 실행력이지만, 동시에 진입 장벽이 그만큼 낮아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구간에서는 결국 원가와 속도가 승부처가 됩니다. 누가 더 싸게 만들고, 누가 더 빨리 시장에 내놓고, 누가 더 저렴한 광고비로 도달하는가. 이 경쟁에는 끝이 없습니다. 진입 장벽이 낮으니 늘 새로운 경쟁자가 더 싼 가격, 더 빠른 AI 최적화로 들어옵니다. 이것이 앞서 1편에서 말한 "제품 공급 폭발"의 실체입니다. 검증과 운영까지 AI가 대신해주면서, 이 폭발은 더 가속화됩니다.
깊이 있는 경쟁: 누가 더 확실한 취향을 가지는가
반대로, 어떤 제품은 아무리 AI로 빠르게 검증하고 만들어도 쉽게 복제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 제품이 파는 것이 기능이 아니라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AI는 "이런 성분의 세럼이 인기 있다"는 데이터를 알려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이 성분을 이 순서로, 이 농도로 조합했는지"에 담긴 관점, 그리고 그 관점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스토리는 데이터가 아니라 취향에서 나옵니다. 이 취향이 브랜드에 배어 있으면, 경쟁자가 같은 성분으로 비슷한 제품을 AI로 빠르게 만들어도 "그 브랜드다움"까지는 복제하지 못합니다.
앞서 2부에서 다룬 나노·마이크로 인플루언서의 힘도 결국 이 얘기와 같은 뿌리입니다. 팔로워가 적어도 특정 카테고리에서 신뢰받는 계정이 메가 인플루언서보다 전환율이 높은 이유는, 그 계정이 파는 것이 노출이 아니라 검증된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3)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 통합적 통찰로 취향을 스토리텔링하는 능력
💡 핵심: AI 시대에 소비재 브랜드가 취향 싸움에서 이기려면, AI가 잘하는 것(검증, 생산, 최적화)과 AI가 못 하는 것(관점, 서사, 취향)을 정확히 나눠서 통합적으로 설계해야 합니다.
이 시점에서 브랜드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해집니다.
검증과 컨텐츠 생산은 AI에게 최대한 맡깁니다. 어떤 제품이 반응이 있을지, 어떤 카피가 클릭을 부르는지, 어떤 색상 조합이 잘 팔릴지는 AI로 빠르게 테스트하고 최적화합니다. 이 영역에서 사람이 직접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은 이제 비효율입니다.
관점과 서사는 사람이 만듭니다. 왜 이 브랜드가 존재하는지, 이 제품이 어떤 삶의 태도와 연결되는지, 이 취향이 누구의 어떤 경험에서 나왔는지. 이것은 AI가 대신 만들어줄 수 없습니다. AI는 좋은 카피 후보 다섯 개를 빠르게 만들어줄 수 있지만, 그중 어떤 것이 우리 브랜드의 진짜 목소리인지는 사람이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둘을 통합하는 것이 지금 가장 희소한 역량입니다. AI로 빠르게 검증하고 만드는 실행력과, 그 제품에 확고한 관점과 취향을 불어넣는 능력을 동시에 가진 팀. 실행은 빠른데 관점이 없으면 그저 그런 미투 제품이 쏟아지고, 관점은 있는데 실행이 느리면 시장에서 도태됩니다. 이 둘을 다 가진 팀만이 취향 싸움에서 계속 이길 수 있습니다.
헬스케어를 예로 들면, AI로 어떤 성분 조합이 시장에서 반응이 좋은지 빠르게 검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이 조합이 환자의 삶에 의미가 있는지"를 진짜 경험에서 나온 언어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은, 그 영역을 실제로 살아본 사람의 관점에서만 나옵니다. 이 관점을 가진 채널(2부에서 다룬 정확한 오디언스 밀도를 가진 채널)과, 이 관점을 빠르게 검증하고 실행하는 능력(AI 기반 카탈로그와 영상 검증, 그리고 라이트앵커식 에이전트 운영)이 만나는 지점. 그곳이 지금 소비재 시장에서 가장 방어력 있는 자리입니다.
라이트앵커의 실행력은 놀랍지만, 스스로도 인정하듯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사업을 잘하는 AI 모델"을 찾아가는 실험이지, 특정 브랜드에 확고한 취향과 관점을 불어넣는 작업은 아직 아닙니다. 이들이 AI로 빠르게 실험하고 검증하는 역량과, 헬스케어·의료와 같이 깊은 전문성과 취향이 요구되는 버티컬에서 신뢰를 쌓아온 팀의 관점이 결합시키는 것이 앞으로의 벨류일 것 같습니다.
마치며: 3부작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이 시리즈는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했습니다. AI가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면, 생산이 0원에 가까워지면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하나..?
1편에서는 제품이 공짜가 된 시대에 유통이 해자라고 했습니다. 2편에서는 인플루언서가 넘치는 시대에 진짜 오디언스 밀도를 아는 팀이 해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편에서는, AI가 검증과 생산까지 대신해주는 시대에 남는 마지막 해자가 취향이라고 합니다.
논리는 하나로 연결됩니다. AI가 만들기와 검증하기의 비용을 낮출수록, 그 낮아진 비용 위에서 무엇을 만들지, 그리고 왜 그것이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관점의 가치는 계속 올라갑니다.
시장이 AI로 평준화될수록, 취향 또는 견해를 가진 사람의 가치는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희소성의 법칙은 단순합니다. 모두가 가진 것의 가치는 내려가고, 아무도 못 가진 것의 가치는 올라갑니다.